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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이후부터 발생 전까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옥음방송에 따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승낙한다는 것, 즉 "일본의 항복"이 일본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다. 다음 날인 16일부 《시마네 신문》 사설에서는 이를 "휴전조칙"이라고 전하였다. 국민에게 "국가의 보존"(일본어: 国体の護持 고쿠타이노 고지[*])을 밝힌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총사직하였으며, 17일에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내각이 발족하였다. 일본이 정치적 격동을 맞게 된 가운데, 시마네 현지사로 시마네 현 국민의용대 본부장이기도 했던 야마다 다케오는 15일에 '고유'(告諭)를 발표하여, "반성의 마음과 쓰라린 아픔을 가슴에 새길 것"과, "자포자기나 증오심 때문에 일본 국민들의 분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을 현민들에게 부탁하였다. 다음날 16일에는 "조국의 부흥", "황국의 부흥"을 위해 현민의 결속을 이룩한다는 목적에 따라 "현민지휘방책대강"을 결정하여, "이번 외교 충돌의 경과·내용 및 전쟁 종결을 가능한 한 현민들에게 발표"한다는 방침을 전했다. 또 3, 5, 6항에서는 현민들 스스로의 반성을 바탕으로 전쟁의 책임을 나눌 것을 부탁하며, 다른 이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전가하지 말 것과, 천황의 명을 언제나 따를 것을 당부했다. 이처럼 시마네 현 당국이 질서 유지를 위해 움직이는 한편으로 군 당국도 현민을 단속했다. 8월 17일, 마쓰에 지구 사령관이었던 오가와는 "'휴전조칙'을 받아들였다하여 마치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착각하거나, 억지에 기반한 유언비어에 속는 것은 위험하다"고 밝히며, 조칙의 취지에 따라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용감한 투쟁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8월 15일 종전을 전후하여 군대의 내부에서는 궁성 사건이나 가스미가우라 항공대·아쓰기 항공대의 항전 주장, 기지 점거 등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아타고 산에서의 존양동지회원의 농성·자폭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들은 22일 전까지 모두 진압되었지만[24], 시마네 현 마쓰에 시에서는 8월 17일부터 19일에 거쳐 인접한 돗토리현 미호 항공대 기지에서 날아 온 해군기가 "결사 항전"(일본어: 断固抗戦 단코 코센[*])의 주장을 담은 선전물을 뿌렸고, 시내에서도 "소련 타도·성전 완수"의 내용을 담은 벽보가 붙여졌다.[25] 또 가노아시 군 가키노키 촌에서는 8월 20일 새 촌장 선임 무렵 "본토 결전"의 분위기가 퍼져있었다.[26]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일어난 공습을 통해, 일본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음이 이미 밝혀졌으나, 공습을 받은 일이 없는 산인 지방에서는 전쟁을 계속 속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다. 이것이 마쓰에 소요 사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8월 15일, 옥음방송을 들은 하타노와 하세가와는 이미 궐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오카자키와 만났다. 한편 대일본언론보국회 시마네 지부장 사쿠라이는 니타 군의 자택에서 옥음방송을 듣고, 바로 마쓰네 시의 연대 본부에서 아는 사이였던 연대장을 만나, 연대장의 진심을 확인하였다. 사쿠라이는 연대장은 체념한 상태였으며, 군은 궐기할 상황이 아닌 것을 확인했다. 사쿠라이는 오카자키 일행의 수상한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후카야 여관 별관에서 이루어진 논의는 급속도로 의미를 잃어갔다.[28] 군대의 참가가 불가능함을 확인함으로써, 사쿠라이는 오카자키 일행을 덜 주시하게 되었다. 사건 후, 사쿠라이가 봉기의 배후라는 소문이 떠돌자 사쿠라이는 이를 부정했다. 이에 대하여 언론인 하야시 마사유키는 "후카야 여관 본관에서 오카자키 등과 일제히 봉기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던 사쿠라이가 봉기를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오카자키 일행이 무언가를 일으키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과 행동에는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고, 봤어도 못 본 척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29] 또 이노세 나오키도 사쿠라이가 불온한 움직임이 있던 것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28] 이 당시 사쿠라이는 야스오카 마사히로가 설립한 긴케이 가쿠인의 사실상의 산인 지부였던 "산인소행회"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야스오카 마사히로 자신이 종전의 조칙을 펴내는 일에 거들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긴케이 가쿠인도 조칙에 순응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야시 마사유키는 이러한 상황에서 산인소행회장 사쿠라이가 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며, 또 군대와의 연합도 불가능하여 자기 자신이 행동을 할 수 없었지만, 오카자키의 주장에도 공감하였기 때문에 깊이 고민하고 있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했다.오카자키는 종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22], 철저한 항전과 봉기가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도쿄에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오카자키는 특별고등경찰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고등경찰의 과장으로부터 도쿄로 올라가려고 하면 구속할 것이라는 주의를 받았다.[31] 8월 17일, 오카자키가 도쿄로 가는 것을 저지한 특별고등경찰 쪽이 방심하고 있던 사이, 오카자키를 대신하여 하타노가 마쓰에 시를 떠나 도쿄로 떠났다. 다음 날, 하타노는 공습으로 불타버린 도쿄도에 이르렀다. 공습을 받은 도쿄 도를 보면서도 하타노는 일본에 전쟁을 속행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하타노는 나카노 구의 방공호에 있었던, 마쓰나가 모토키의 문하생 니시 미치하루(西 三千春)로부터 도쿄의 정세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충고를 들었는데, 니시는 시마네 현에서 경솔히 움직일 게 아니라 전국민이 일제히 봉기해야한다는 것, 봉기했을 때는 가스미가우라 주둔지에서 비행기를 움직여 환영할 것이라는 니시 스스로의 뜻 등을 하타노에게 전했다. 하타노는 대혼란 상태였던 도쿄 역에서 출발하여, 교토부를 지났을 즈음 한시 바삐 알리기 위해 하세가와에게 전보를 쳤다.2008년 현재의 미호 항공대 기지 (미호 비행장)하타노가 도쿄에 간 사이, 오카자키와 하세가와는 봉기의 구체적인 안을 다듬었다. 특히 오카자키는 군대와의 연락 대책을 위해 분주했다.[31] 후일 하세가와의 증언에 따르면, 마쓰에 시에 주둔하고 있었던 101부대 내 한 중대 정도는 오카자키와 내통하고 있었다고 한다.[33] 8월 22일,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은 26일이라는 것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오카자키는 25일 전에 봉기하기로 결정했다. 후카다야 여관 2층에 수백장의 갱지가 마련되어, 한 장 한 장에 "현민에 고한다" "황국 장병에 고한다" "제국 일본에 항복은 없다" 등의 격문이 쓰였다. 계획에 따르면 미호 항공대 기지의 항공대가 살포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22일 밤에 이미 미호 비행장 기지의 항공대는 해산하였으며, 요나고 시의 육군 항공대 기지에서도 비행기를 띄울 수 없도록 비행기 부품이 모조리 해체되고 있었다.[34] 소요 당시 마쓰에 중학교 4학년으로, 뒷날 산인 방송 라디오 부장을 지낸 이시이 모리오(石井盛夫)는 자택이 주택 소개(疎開)로 없어졌기 때문에 후카다야 여관에 하숙하고 있었다. 이시이는 소요 사건이 발생하기 약 2 ~ 3일 전에 여관 2층에서 "야마다 지사를 죽여버리자!", "검사정도 죄질이 나쁜 놈이다" 등의 수상한 이야기가 큰 목소리로 이야기되고 있던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마쓰에 시에서는 철저한 항전을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시이는 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후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사건의 주동자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오금이 저리게 되었고,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날 가능성이나, 점령군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불안을 느꼈다고 한다.사건 전날23일 밤, 요나고의 육군 항공대 기지에서 돌아온 오카자키는 하타노로부터 들은 도쿄의 정세를 동료들에게 말했다. 그 내용은 어전 회의를 거쳐 천황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 것, 고노에 사단의 청년 장교가 봉기한 것, 요코하마 공업전문학교의 학생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 관저를 습격한 것, 존양동지회가 아타고 산에서 농성했던 것, 가스미가우라 항공대가 항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의 5가지였다.[36] 오카자키는 전부터 무기를 빌려주기로 약속했던 헌병대로 갔지만, 막상 헌병대장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만, 오카자키는 봉기 때에는 봉기대를 가로막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오후 11시가 넘어서, 군대의 협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오카자키는 주머니에서 봉기 계획서를 꺼내, 그것을 하타노에게 보여주었다. 계획서의 요지는 아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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